이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 그 날의 기록1

이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 

[ 그 날들의 기록1 ]

 

 

이혼을 결심한 이유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이유가 쌓여 있었지만,
20년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무관심이었습니다.

무관심은 그 자체로 끝나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무관심으로부터 수많은 이혼의 이유들이 파생되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끝이 바로 무관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의 인연은 참 묘합니다.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운명처럼 결혼을 결심하기도 하고,
10년을 연애해도 끝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이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화를 내고, 싸우고, 울고 버텨도
‘이혼만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혼도 운명처럼 느낌이 오는 때가 있더군요.

 

 

4월, 이혼에 동의했습니다.
5월에는 집을 알아봤고,
6월 초 전세대출이 승인되었고,
7월에 이사를 했습니다.

모든 일이 정해진 순서처럼, 놀라울 정도로 순탄하게 흘러갔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이혼의 아픔을 느낄 틈조차 없었습니다.
타이밍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이혼을 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혼을 결심하기 전까지의 결혼 생활 내내,
저는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 수치심, 모욕감.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팽겨쳐지는 생활 속에서
저라는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제가 붙잡고 있던 단 하나의 목적은
두 아이였습니다.

 

이혼을 결심하게 된 그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기록 1

 

아주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시부모님께서
도시에 가정을 꾸리고 살던 아들에게
함께 농사를 짓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남편은 그 제안에 동의했고,
저와 상의도 없이 시골로 가버렸습니다.

도시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저는
갑작스러운 시골 생활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저에게
남편은 이혼하자고 말했고,
그렇게 시골로 가버린 뒤 생활비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저는 몇 개월 뒤
아이 둘과 살던 동네를 정리하고
시골 근처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도 생각해야 했고,
완전한 산골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마저 시부모님은 마땅치 않아 하셨고,
그곳에서 받은 지원은 월 1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100만 원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식당 홀서빙과 도시가스 검침·점검 일을 병행하며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초등학생 아이를 키웠습니다.

하루는 새벽 6시 반에 시작해
밤 11시가 넘어야 끝났습니다.

오전에는 집집마다 도시가스 검침과 점검을 다녔고,
점심시간에는 식당에서 3시간 홀서빙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하원하면 놀이터에서 2~3시간을 함께 보내고
간식과 저녁을 챙긴 뒤
다시 검침과 점검을 나갔습니다.

아파트는 낮에 사람이 없어
밤 11시가 넘어 혼자 사는 남성의 집을 방문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그리고 엄마로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버티는 동안
남편은 곁에 없었습니다.

농사일이 힘들다며,
허리가 아프다며
제가 부탁한 아파트 단지의 고지서 배달조차
하다 말고 와서 짜증을 냈습니다.

주말에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고
잠시 쉬고 있으면
시댁에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셨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가면
주말에는 농사일을 도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남편이 없는 저 혼자 있을 때만 이루어졌습니다.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냐고요?
집에 오면 방문을 닫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새벽 4시가 넘어 화장실에 가던 중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걷지도 못한 채
남편이 자는 방까지 기어가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했기에
아침 8시까지 참아냈고,
구급대원들이 저를 들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남편의 돌봄은 없었습니다.
친정 부모님의 도움으로 큰 도시로 옮겨
한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 결정은 존중받지 못했고,
나는 필요 없는 짐이었구나.

 

 

그 이후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본능적인 경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기록은
가장 큰 사건 중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쓰며
보시는 분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저의 일부라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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